비틀리스1, 2 (하세 사토시, 황금가지)
<Boy meets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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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이제 현실이 될 수 있다.
코로나 19의 등장은 분기점이다. 세상은 이제 바뀌었다. 마스크는 자신의 분신이 되었다. 사람들의 악수가 주먹 인사로,그리고 묵례로 바뀌었다. 기타 등등. 이제 옛날의 일상은 특별함이 되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코로나 19 이전의 세계는 영상으로나마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게 ‘뉴 노멀’이라는 걸까?
이번 서평의 대상은 SF소설 ‘비틀리스’이다. 즉, 미래 세계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 사회가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코로나 19의 등장을 우리는 예상했는가? 그리고 이후 일어난 사회의 변화, 갈등, 반지성주의, 폭동, 파괴, 충돌을 예언했는가? 우리는 미래는 묻어두고 막연히 낙관하며 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나온 결과는? 코로나 19다. 낙관적 전망은커녕 비극만 눈앞에 펼쳐져 있다. 또 이 비극이 얼마나 갈지, 얼마나 심해질지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사회가 미래의 사회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코로나 19도 일어난 마당에, SF소설 속 이야기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코로나 19의 등장은 미래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는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우리가 상상한 SF 소설의 세계도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중 여기서는 소설 ‘비틀리스’의 세계를 훑어본다.
Boy meets Girl? 소설 ‘비틀리스’의 매력은?
비틀리스는 AI와 휴머노이드가 발전한 세계이다. 휴머노이드 하면 기계의 반란이 먼저 떠오른다. ‘터미네이터’, ‘아이로봇’ 등 많은 명작들이 그 예다. 하지만 이 글은 앞선 작품과 달리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미시적으로 조명한다. 따라서 거시적인 사건, 즉 전쟁 장면 따위는 주된 사건이 아니다.
이것이 소설 ‘비틀리스’의 첫 번째 매력이다. 주인공을 포함하여 주연들이 로봇, AI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는 현저하다. 반면에 로봇의 경우에도 각자의 AI의 특성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 그걸 한 사람, 하나의 로봇을 따라가며 세심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미시적이라는 말은, 곧 마치 로봇을 대하는 인간의 여러 미래상을 작가가 한 소설 세계 안에서 다 볼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사람인 독자는 아마도 작중 인물 중 적어도 한 명 정도에는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하며 로봇과 AI에 대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봇, AI의 진화 목적에 따라 이렇게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겠다고 하는 놀라움도 느낄 수 있다.
둘째 매력은 작가가 주장하는 새로운 인간 – 로봇 간의 관계 설정이다. 주인공 엔도 아라토와 그의 안드로이드(작중 hiE)인 레이시아의 만남과 성장, 그리고 결말은 작가가 지향하는 곳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인간과 AI 간이 같이 만드는 미래다.
엔도 아라토는 주인공으로서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시원시원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작가가 표현하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그의 인간성은 hiE인 레이시아의 질문,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레이시아는 그에게 인간과 hiE의 차이를 끊임없이 자각하게 한다. 소유물에 불과한 자신은 hiE일 뿐이고, 주인공인 엔도 아라토는 인간을 흉내 내는 자신에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인간의 행동에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hiE는 클라우드에 저장된 데이터로 산출된 ‘적합한’ 움직임을 출력할 뿐이다. 따라서 레이시아는 행동에 앞서 계속 자신의 오너인 주인공에게 행동 승낙의 의사를 묻는다. 이는 hiE라는 것이 한낱 소유자의 물건이라는 것, 그리고 책임조차 온전히 질 수 없는 무의미한 도구일 뿐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주인공은 작중 사건들을 겪으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hiE의 행동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출력물일 뿐이다. 행동에 어떤 의미도 없다. 하지만 hiE의 행동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다. 이들은 ‘도구’이고 따라서 ‘인간’이 가진 의미를 실현하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다. 그 결과로 주인공은 ‘인간’과 ‘hiE’를 하나로 통합한다. 인간은 도구를 통해 확장한다. 인간은 의미를 만든다. 도구는 인간의 의미를 실현한다. 따라서 인간과 hiE도 하나로서 의미가 있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hiE를 통해 확장된다.
이러한 가치관 형성 과정은 주인공이 품는 감정의 변화로 알 수 있다. 그는 처음, 레이시아의 예쁜 외모를 보고 첫 만남에 호감을 품고 집으로 데려온다. 이후 레이시아가 인간과 hiE의 차이를 몇 차례 보여주고 또 평범했던 일상에 큰 파란이 닥치자 레이시아를 의심하고 또 고뇌한다. 하지만 레이시아를 믿기로 한다. 믿음은 신뢰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엔도 아라토는 레이시아의 믿음, 아니, 믿는다는 자신의 맹세를 배신한다. 그는 곧 자신이 신뢰를 배신했음을 후회하고 레이시아를 찾는다. 이때 그의 감정은 또 한 번 변화한다. 그는 레이시아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인간과 도구는 하나일 때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는 작가의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매력은 바로 소설 내부의 갈등 관계다. 소설 ‘비틀리스’는 엔도 아라토가 레이시아를 만나 일상이 파괴되는 과정과 그 회복을 내용으로 한다. 둘의 장애물은 위에서 말한 다른 주연과 로봇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주인공과는 다른 가치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hiE에 의해 현실적인 경제 문제를 겪으며 hiE에 적개심을 품는 인간, 인간은 기계와 다른 ‘인격’이 있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는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간 관계에 회의를 느끼고 hiE이 인간의 대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 이들의 등장과 만남, 갈등과 해소를 통해 주인공의 깨달음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째서 읽어야 하는가?
코로나19는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는 21세기의 비극으로 회자될 것이다. 일개 바이러스의 출몰이 미래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상상한 이가 몇이나 될까? 그리고 이 변화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는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뉴노멀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쓴 뒤 생긴 단어다. 새로운 가치관이 기본이 된다는 이 용어는 그저 학술 용어일 뿐이 아니다. 뉴노멀은 현실의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가치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 변화하는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자, 포기한 자 등등. 뉴노멀은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가치관의 붕괴와 재수립을 촉발했다.
이렇게 본다면 소설 ‘비틀리스’를 읽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소설은 뉴 노멀처럼 새 시대가 도래한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가치관 붕괴와 재수립의 과정을 보여준다. 코로나 19의 시대 끝에 무엇이 펼쳐질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 ‘비틀리스’는 가치관 변화의 때에 누군가에게 등 떠밀라는 것이 아닌 스스로 가치관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엔도 아라토가 그러했듯 말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Boy meets Girl. 소설 ‘비틀리스’의 시작과 마지막은 사람 엔도 아라토와 hiE 레이시아의 만남으로 끝난다. 이 만남은 단순히 서로의 이해와 사랑을 넘어, 인간과 로봇의 가치관이 재정립되었다는 신호이다. 우리도 주인공처럼 되돌릴 수 없는 사건을 마주하였다.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고뇌하고 또 고뇌하여 가치를 재정립하고 자신이 내린 결론을 믿고 이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다. 그동안 일상이 무너지고 파괴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엔도 아라토 또한 그러했듯 결론을 내고, 믿고, 행동하자. 소설의 결말은 이미 났지만, 우리는 아직 결말에 다다르지 않았다.
- 저자
- 하세 사토시
- 출판
- 황금가지
- 출판일
- 2020.07.23
- 저자
- 하세 사토시
- 출판
- 황금가지
- 출판일
- 2020.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