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세종서적)
책 소개
능력주의는 공정으로 가는 필수적인 수단일 걸까?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한 화두는 단연 ‘공정’이기에 이 의문은 도발적일 수 있겠다. 우리는 으레 혈연, 지연, 학연 따위를 타파하고 능력주의를 실현하면 공정한 유토피아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예컨대 우리는 대입의 수시보다는 수능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정시를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 수능 시험에서 나오는 점수는 모든 학생들을 객관적인 숫자로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언뜻 보면 이 점수대로 비교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는 그러한 의견에 반대한다.
저자는 공정과 능력주의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의 의견은 이렇다. 20세기, 실제로 토지와 가문으로 특권을 유지하던 귀족들은 능력주의의 등장과 시류를 잘 이용한 자들에 의해 끝내 파멸했다. 결과적으로 사회는 귀족들이 아니라 서민들, 그것도 인구 구성 비율 중 가장 두텁게 쌓인 중산층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능력주의는 자신이 없애버린 그 귀족을 성격만 바꾼 뒤 그대로 탄생시켰다. 바로 현대 엘리트이다. 이는 중산층 중심의 미국 민주주의 사회를 빠르게 붕괴시켰다.
이 신 귀족은 구 귀족들의 특권 기반인 토지와는 다른 자산과 도덕으로 무장했다. 엘리트는 인적자본, 즉 그들이 자라면서 배워온 온갖 지식, 능력을 제 계급의 원천으로 갖는다. 또한 능력주의는 사회의 도덕 가치를 바꿔버렸다. 그리고 그런 인적자본과 노력의 태도를 자기 아이에게 세습한다. 과거 구 귀족들이 나태와 여유, 여가를 자신들의 부나 계급의 과시로 많이 이용했다. 상위층의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반대로 하류층은 여가도 없고 그저 단순 노동의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 순간 선은 바로 여유, 여가였다. 바로 강자의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귀족은 이러한 공식을 뒤바꿨다. 이전까지 하류층을 대표하던 성실, 노력 등의 가치가 반전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도덕을 ‘노력’을 ‘선’이라 한다. 따라서 엘리트들은 끝없는 노력을 통해 점점 수가 줄어드는 상위층으로 가려고 몸부림친다. 그들의 노력은 이미 비상식적이다. 반면 하류층은 근무 시간이 점점 줄었으며 여가 시간은 많이 늘었다. 그렇지만 이들이 노는 시간이 많은 건 게을러서도, 나태해서도 아니고, 당연히 악해서도 아니다. 하류층 근로자는 이제 양질의 일자리는커녕 일자리 자체를 얻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신 귀족의 도덕에, 능력과 노력이라는 두 단어 때문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동정과 도움의 대상이 아니라, 부도덕한 존재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제 이들은 심하게 말하면 서민들에게 ‘사회의 암덩이’ 정도로 취급된다.
신구 귀족의 교체기 사이의 짧은 시간에 잠시 사회 주류를 차지했던 중산층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로 그들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미처 저항해볼 시간도 없이 빠르게 신 귀족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뺏겼다. 점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려워졌으며, 그런 일자리를 얻더라도 이전과 같은 삶의 보람은 없는 ‘나쁜 일자리’ 외에는 취업할 곳은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하류층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최근 미국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예컨대 트럼피즘(=트럼프주의) 등 극단주의 사상에 경도된 사람들로 변질되었다. 구시대의 향수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든 어쨌든 그렇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중산층은 붕괴되고 하류층은 하루하루 나쁜 직업을 전전하는 이런 상태)서 소위 ‘폼나는 직업’(그렇지만 자기 삶은 없는 직업)을 위해 경쟁하는, 위로 올라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엘리트는 좋을까? 슬프게도 저자의 주장은 이들의 삶도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한다. 구 귀족이 토지 등의 자본을 갖고 타인의 인력을 쥐어짜 부를 얻었다면, 신 귀족, 즉 엘리트는 인적자본 – 그게 적성이든, 지식이든 능력이든 – 갖고 있으나 구 귀족처럼 쥐어짤 타인이 없다. 오로지 자신 스스로를 쥐어짜야 한다. 해마다 과로사로 숨지는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을 보라. 이들이 바로 스스로를 쥐어짜고 있다는 방증이다. 당혹스러운 사실은 엘리트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는 것이다. 워라벨이란 단어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이제 나 자신의 시간을 찾겠다.’
그러나 엘리트들은 모순적으로 제 아이들을 양육한다.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알면서도 아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가도록 등을 떠민다. 자신의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주는데 열성을 다 한다. 마치 구 귀족이 토지 소유권을 물려주는 것과 같이. 이들은 아이들에게 인적자본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하다. 결국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점점 줄어드는 상위층의 지위를 얻기 위해 소모된다.
한편 하류층으로 떨어진 중산층과 원래 빈곤했던 사람들은 능력주의가 깔아놓은 판의 희생양이 된다.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저질 일자리도 경쟁을 해야 할 만큼 수가 줄어들었다. 그 일자리라도 찾으면 사실 입에 풀칠은 하니 다행이기는 하다(사실 정신적, 심리적으로는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겠지만). 일이 없는 사람들은 강제 휴식, 강제 여가의 굴레에 갇힌다. 그러면 주위에서 하는 말. ‘일도 안 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놈’. 그렇게 이들은 부도덕한 인간이 된다.
하류층의 아이들은 그런 부모 밑에서 희망도 없는 삶을 산다. 상류층이 제 자녀에게 주는 교육은 하류층에게는 사치다. 결국 인적자본이 없는 채로 이들은 사회로 나간다. 경쟁이 될 리 없으니,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또 저질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능력주의는 공정인가?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인 걸까?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책 ‘엘리트 세습’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그대들, 독자들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추천 독자
책 ‘엘리트 세습’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혹은 생각해본 적 없는 진실을 이야기한다. 기회의 평등, 공평한 출발선을 만드는 것은 능력주의에 있다는 평범한 생각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수능과 대학 학점과 기업 성과가 그 사람의 전부인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침이다.
따라서 이번 책의 추천 독자는 저자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아직 능력주의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해서, 학연과 혈연과 지연 따위로 세상이 돌아가는 바람에 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마지막으로 능력주의가 무엇인지, 어떤 폐단을 낳고 있는지 알고 싶은 모든 분께 이 책을 추천한다.
- 저자
- 대니얼 마코비츠
- 출판
- 세종서적
- 출판일
- 2020.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