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서평

[서평] 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세종서적)

작은독서가 2022. 10. 15. 01:00

<네 수저 색은 무엇이냐?>

단절된 사회는 이해로 해결할 수 있다

책 '엘리트 세습' 전자책 표지 사진

선택적 인권 감수성

2022년 5월 9일, 한국 엘리트의 민낯이 드러났다. 연세대학교 학생 세 명이 같은 학교의 청소 노동자가 속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분회 관계자를 고소한 것이다. 사유는 학습권 침해. 약 600만 원 정도를 배상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었다. 전례 없는 상황에 노조는 당황했고, 한국 사회는 경악했다. 이에 분노한 사람들은(같은 학교의 다른 학생도 있었다.) 즉각 청소 노동자를 지원하고 나섰다.

대학교 청소노동자 처우는 해묵은 문제이다. 이들은 노동 강도가 높지만 인간적 처우를 받지 못한다. 법과 정의, 인권을 배우는 곳에서 정작 청소 노동자의 인권은 개나 줘버린 듯 행동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노동자는 하인이었다. 과거 조선에는 향교의 잡역 담당으로 공노비를 배정했다는데, 현대는 공노비 대신 이들이 있다. 모든 학교 구성원에게 무시당하는 공노비.

시위는 놀랍지 않았다. 언제고 터질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소박했다. 제대로 된 휴게 공간을 달라, 씻을 곳을 달라, 시급 400원 올려달라. 그런데 학교는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여느냐’라는 진부한 사극 대사처럼 이들을 외면했다. 대학교 청소 노동자는 계속 학교 노비라고 선언하는 듯했다. 소송한 학생도 그리 여겼을 것이다. 다만 모든 학생이 소송을 걸진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만 특별한 케이스로, 일부 예외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다른 학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이 어지른 거 치우는 게 청소 노동자였다. 근데 학생들은 청소 노동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낀 적은 있을까. 그런 거 하라고 뽑은 사람이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럴 거면 임금이라도 똑바로 줬어야지. 처우도 적정 수준은 맞춰 줬어야 하고.

여론이 들끓자 그제야 청소 노동자와 연대하겠다는 대학생들이 보인다. 같이 시위하는 모습이 뉴스 방송을 통해 송출됐다. 필자는 궁금했다.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있을까. 시위는 예전부터 있었을 텐데. 사건이 없었어도, 여론이 몰랐어도 이들은 움직였을까? 싫은 소리 미운 소리 갖가지 소리를 청소 노동자가 온몸으로 맞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학생들은 진정 이들을 위해 행동하기는 한 걸까. 이거 그냥 위선 아닌가.

복잡한 마음으로 품으면서도 한 가지 웃긴 게 있기는 했다. 소송을 건 학생 한 명은 무려 ‘시민단체’ 대표로 보편 인권을 위해 활동한 사회 운동가였다는 것. ‘모병제추진시민연대’(https://antidraft.wixsite.com/main )의 현 대표인 그 학생은 징병제 폐지 시위, 정치인 면담, 헌법 소원 등을 진두지휘했다. 그런데 그 인권, 학교 노비가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706500171) 과연 이것이 엘리트의 인식, 명문대의 수준인가.

새로운 계급 사회의 시작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에게 엘리트는 신 귀족이다. 구 귀족은 땅, 건물, 농노(혹은 노예) 등의 자산을 핏줄이란 이유로 세습했다. 현대 엘리트도 엘리트 계급을 자식에 세습한다. 구 귀족과는 달리 실물 자산보다는(물론 없다는 건 아니다.) 인적 자본을 물려준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게 뭐가 문제일까? 인적 자본, 가령 지식이나 학력은 구 귀족의 자기 재산을 그냥 자식에게 넘겨주는 것보다는 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 능력주의, 우리가 그토록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능력주의를 실현하는 것뿐 아닌가.

능력주의는 구 질서를 무너뜨렸다. 엘리트는 능력주의가 무너뜨린 새 세상에서 탄생했다. 예컨대 미국의 대학은 능력주의가 도래하자 집안보다 개개인의 능력으로 학생을 선발했다. 더 똑똑한 자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회. 여기서 능력은 출중하나 집안이 한미한 이들이 자수성가를 이룰 수 있었다. 실제로 20세기까지 자수성가 엘리트는 쏟아져 나왔다. 반면 능력 없는 주제에 집안의 자산을 물려받던 이들은 쇠락했다. 권력. 부는 엘리트의 것이 되었다. 이대로만 유지했다면 능력주의는 불멸의 신화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 신화는 무너졌다.

능력주의가 자수성가한 엘리트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엘리트 이외 사람들의 엘리트 계층 진입을 막는 장벽으로도 작용했다.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 능력주의의 선기능은 초반에만 기능했을 뿐, 일정 수준의 엘리트가 양성되자 곧 그 선기능은 사라졌다. 곧 능력 습득은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었다. 전문성은 정교한 학습 과정과 환경은 기본이며, 추가로 개개인의 노력 투입을 요구한다. 결국 엘리트 계층 외의 사람들은 자수성가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제 엘리트 아닌 중산층과 빈곤층은 절대로 엘리트가 될 수 없다. 21세기, 이제 엘리트는 엘리트를 낳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식과 함께 빈곤층으로 굴러 떨어진다. 이제 엘리트는 구 귀족과 다를 바 없는 신 귀족이 되었다. 앞의 연세대학교 사건은 능력주의의 수혜자인 신 귀족이 아닌 자를 차별한 사건이다. 암암리에 존재하는 최고 학벌의 엘리트 후보들과 청소 노동자 사이는 이제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엘리트는 알게 모르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무시한다.

절단 사회

책 ‘엘리트 세습’은 20세기의 미국 사회와 현대 미국의 차이를 비교, 대조한다. 두 시대의 차이는 계급 사이 경험의 단절이다. 20세기는 미국의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생활 경험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가령 교육, 주거지, 결혼, 여가 등은 서로 간에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나 현대 미국은 엘리트인 자와 아닌 자의 생활은 아예 서로 섞일 수 없을 정도로 유리되었다. 예를 들면 두 집단의 구매 능력의 차이는 천양지차라고 할 만하다. 엘리트가 명품을 넘어 지속 가능한 물건, 환경 친화적 제품 따위를 사느라 상당한 돈을 쓰는 반면, 중하류층 사람들은 더 저렴한 물건, 심지어 푸트뱅크의 무료 식재료 등을 이용한다.

심각한 건 능력주의가 도덕의 가치까지 바꿨다는 것이다. 구시대는 여가, 여유로운 삶을 귀족의 가치로 여겼다. 바쁜 삶, 노력, 근면성실은 농노, 노동자들의 가치였다. 현대는 반대다. 엘리트에게 여유로움은 그 즉시 엘리트로서 실격을 상징한다. 항상 자기 일을 위해 바쁘게, 심지어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것이 긍정적 가치가 되었다. 반대로 빈곤층은 일자리를 갖지 못해 비자발적 여유 상태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근면성실이 선악의 가치 판단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노력이 곧 선이라는 망상이 시작됐다. 이 망상은 힘이 셌다. 능력주의의 혜택을 받지 못한, 빈곤층들도 노력이 선이고 능력 없는, 그래서 여유로운 자신들은 악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노력이 선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것을 철석같이 믿는다. 이 믿음은 가뜩이나 단절된 엘리트와 그 외 계층을 사정없이 찢어 놓는다. 성실, 근면, 노력 등 인적 자본 형성에 필요한 가치는 선과 공정이다. 그 반대는 악과 불공정이 되었다. 가령 실직, 무스펙, 저학력 등은 악이다. 일을 구하지 못한 자는 악. 노력해서 성공한 자 선. 파트타임 일로 근근이 살아가는 자는 악. 야근에 야근을 더하며 제 수명을 깎아 일하는 전문직은 선. 선악은 이제 계급 간 차별을 정당화한다.

몰이해의 시대

지긋지긋한 분열, 반목의 사회. 우리는 갈등이 사회를 좀먹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갈등 해결을 위해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결국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양극화된 엘리트와 엘리트 아닌 자들은 끝나지 않는 충돌을 계속한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제 필자는 두 집단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몰이해는 문제를 악화시킨다. 연세대학교 사건을 생각해보자. 청소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고소를 진행한 대학생들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청소 노동자의 요구는 그냥 싸구려 소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사는데, 저 사람들은 그냥 돈이나 올려달라고 시끄럽게 하고 말이야. 노력을 했으면 저런 직업을 갖지 않았겠지. 저건 저 사람들이 잘못됐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반면 자신이 시위는 의미 있는 울부짖음이라 여겼으리라. 자신은 명문대 학벌, 노력가, 엘리트 후보니까. 설령 그런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해도, 무의식 중에 청소 노동자와 자신은 ‘다른’ 존재라고 여겼을 게 눈에 선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소를 했을 리 없겠지. 오히려 같이 싸웠으면 싸웠지.

슬프지만 이런 학생은 ‘일부 예외’로 어물쩍 넘길 수 없다. “한 시간에 150만 원을 쓰고 수업을 듣고 있는 건데 시급 400원 올려 달라고 공부를 방해하는 것은 좀 받아들이기 힘들다.”(https://youtu.be/uWwQPhB4 d7 w? t=84) KBS 뉴스에서 연세대학교 사건에 대한 질의의 답변 중 하나다. 답한 대학생이 어떤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나는 150만 원이나 내면서 명문대에 다니는 학교 학생인데, 그래서 150만 원짜리 수업을 듣고 있는데 감히 400원 올려달라며 소음을 내는 건가? 이거 불공정한데.’ 내 추측이 틀렸으면 좋겠다. 추측한 속내가 사실이라면 필자가 상상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는 좀 많이 암울할 것 같으니까. 제발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자.


엘리트 세습
실력대로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능력주의가 중산층의 빈곤화와 함께 엘리트를 자기파멸로 이끈다고 비판한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의 『엘리트 세습(원제: The Meritocracy Trap)』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2019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미국 사회에 능력주의 논쟁을 촉발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출간 일정 문의가 쇄도하는 등 공정성에 관한 우리 사회의 높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코비츠 교수는 자신이 마주해온 미국 엘리트 사회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변화가 미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탁월하게 추적한다. 능력주의는 결국 현대판 귀족 사회, 즉 엘리트 신분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귀족은 땅과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현대의 엘리트는 값비싼 교육을 통해 ‘인적자본’으로 대물림된다. 축적된 능력 그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대표적인 능력주의 사회로 한국을 지목하기도 한다. 오늘날 엘리트는 일생을 전력투구해서 인적자본을 쌓고 ‘멋진 일자리’를 얻은 뒤에도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입증하다가 탈진한다. 능력주의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는 『엘리트 세습』은 능력주의의 두 중심축인 엘리트 교육과 엘리트 위주 일자리의 가속에 가해야 할 대안 역시 제시하고 있다.
저자
대니얼 마코비츠
출판
세종서적
출판일
2020.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