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책/서평

프린세스 바리 (박정윤, 다산북스)

작은독서가 2022. 3. 13. 04:11

<죽음을 인도하는 자>

책 '프린세스 바리' 종이책 표지 사진

언젠가 쇠락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나는 구불거리는 도로에서 길을 잃었다. 오전이었는데, 좁은 길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웠다. 더구나 칠이 벗겨진 건물들이 도로 양 옆을 꽉 채운 탓에 답답했다. 그곳의 건물은 드문드문 비어 있었다. 뿌옇게 먼지 낀 유리창 너머는 알아보기 어려운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녔다. 바깥의 오래된 간판이 없었다면 어떤 곳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서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노파였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가격을 불렀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여자 나이를 말하기도 했다. 나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지나가려 했다. 노파는 나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정말 젊은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공공연하게 매춘을 알선하는 사람이구나. 곧장 뒤돌아 노파를 뿌리쳤다. 그 사람은 몇 마디 더 한 듯했다. 욕인지 모를 거친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나는 귀를 막고 도망쳤다. 불쾌했다.

프린세스 바리를 읽었을 때 떠오른 광경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둑한 거리, 쇠퇴해 빈 공간만 남은 건물, 언제부터 쌓였는지 알 수 없는 먼지 때, 드문드문 열린 가게를 지키는 노인들, 그리고 나를 부르는 노파의 목소리.
책 ‘프린세스 바리’는 그런 책이다.


생과 사

‘프린세스 바리’는 죽음을 인도하는 ‘바리’의 이야기이다. 바리의 유래를 알면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 바리는 바리데기 설화에서 유래했다. 바리데기에서 바리는 불쌍한 영혼을 인도하는 신이다. 이승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포기한 그녀의 결단은 감탄할 정도다.

프린세스 바리에서 바리는 죽음을 좀 더 편하게,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한다. 독초와 해독초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최대한 아프지 않은, 편안한 죽음을 상대가 맞이하도록 말이다. 방식에 있어 좀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바리데기나 프린세스 바리나 바리의 일은 같은 일이다. 영혼을 인도하는 일. 죽은 이들을 위로하는 일 말이다.

이 책 ‘프린세스 바리’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이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중심적인 사건에는 언제나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바리의 이 행위는 이 책의 핵심이다.

위로

바리의 행위는 죽음을 부른다. 하지만 냉혹한 살인은 아니다. 그보다는 따뜻한 위로가 자리한다. 바리가 죽음을 인도한 이들, 즉 산파에게도 연슬에게도 그리고 청하사 할머니에게도 바리는 위로를 했다. 즉, 바리의 행위는 위로이다.

위로. 특히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 곁에서 하는 위로는 특별하다.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일과 같다. 온 마음을 통해 상대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 보통 이 역할은 가족이나 친구가 맡는 일이다. 적어도 죽기 직전에 옆에 있을 사람은 특별한 사람일 것이다. 특별한 일이니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바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바리가 인도한 이들은 모두 중심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간이다. 서로 공통점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차이점을 꼽는 것이 더 쉽다. 그들은 변두리에 있다는 것 빼고는 이질적인 사람들이다. 산파, 연슬, 청하사 할머니, 등이 그렇다.

이들은 밑바닥 사람들을 상징한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들의 옆자리는 아무도 채우지 않았을 것이다. 정황상 이들은 홀로 죽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옆에 바리가 있었다. 바리는 이들을 위로하고 죽음으로 인도했다. 이는 바리가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존재임을 뜻한다. 마치 불쌍한 영혼을 위해 신이 된 바리데기의 바리와 같다.

그런데 바리는 자신이 감내해야 할 고난을 겪지 않았다. 바리데기의 바리가 겪었던 무수한 고통처럼 프린세스 바리의 바리도 자신의 소중한 것을 잃는 아픔을 겪는다. 바로 그녀가 사랑한 사람인 청하다.

청하

청하는 청하사 할머니의 손주다. 공장의 굴뚝 청소일을 한다. 청하의 가장 큰 소원은 바리와 사는 것이다. 바리와 결혼하고, 바리와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살고 싶어 한다. 청하와 바리의 만남은 반쯤은 의도적이었다. 산파는 청하가 바리를 데려가기를 바랐다. 청하사 할머니도 바리를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산파는 공공연하게 청하와 바리를 같이 있게 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청하는 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는 바리도 마찬가지였다. 바리는 청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이를 갖고, 그와 가족이 된다.

불행의 조짐은 시작부터 있었다. 바리는 자신의 살인 행위를 다른 이에게 들켰다. 녹쇠, 그곳에 있는 폭력배에게 말이다. 그는 바리에게 일거리를 맡기고 돈을 준다. 바리는 돈을 받는다. 그리고 바리는 녹쇠가 맡긴 일, 즉 죽음을 인도하는 일을 수행한다. 모르는 사람이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바리는 일을 해 낸다. 하지만 일이 틀어진다. 녹쇠는 다시 한번 일을 맡긴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을 만큼 아프게 하되 죽지 않도록 해달라는 의뢰였다. 바리는 그 일을 거절했다. 죽음을 인도하는, 불쌍한 영혼을 위로하는 바리에게 이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한편 바리의 일을 청하는 알지 못했다. 청하는 바리와 같이 사는 나나진에게 바리가 스폰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건 오해였다. 하지만 청하는 그 말을 믿고 바리에게 일을 맡긴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석연치 않은 일로 굴뚝에서 죽었다. 죽을 때는 혼자였다. 바리는 타인 옆에서 죽음을 위로하였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의 죽음을 위로하지 못했다. 불쌍한 영혼인 청하는 바리의 인도를 받지 못했다.

이 상황은 바리데기의 설화와 프린세스 바리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두 이야기에 나오는 바리는 생명을 다루는 자이다. 또한 이들은 고통스러운 장애물과 직면한다. 바리데기의 설화에서는 그것이 여러 과제들이었다면 프린세스 바리에서는 청하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한편 이 고통은 바리가 각성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바리데기의 바리는 자신의 부모를 살린 이후에 저승의 신이 된다. 그녀는 불쌍한 영혼을 인도하는 신이 되겠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 일을 선택한다. 프린세스 바리에서의 바리도 마찬가지다. 이후 토끼 할머니를 자신의 손으로 인도하겠다고 다짐한다. 이는 더 이상 죽음을 인도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바리의 심경에 변화를 나타낸다. 즉, 불쌍한 자들의 죽음을 인도하는 역할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아쉬운 점

‘프린세스 바리’는 매력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몇 가지 눈에 밟힌다. 우선 사람 개개인의 서사가 너무 얕다. 이 소설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쓸데없이 소모된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연슬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왜 갑자기 창관에 불을 질렀는지, 거기서 왜 겁을 집어먹고 죽지 않으려고 다시 뛰어내렸는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물론 작가의 입장에서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 듯하다. 그렇지만 이해할 단서조차 거의 없는 상황에서 독자가 이걸 어떻게 끼워 맞출 수 있을까?

또 첫 부분부터 등장하는 녹쇠라는 인물도 이해하기 어렵다. 녹쇠는 바리가 한 살인에 대해 알았다. 그리고 바리에게 살인 의뢰를 하는 냉혹한 인물이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 바리가 녹쇠의 의뢰를 거절하자 큰 해코지 없이 그냥 보내버린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이 인물이 그렇게 잔인하다고 묘사하고서는 그냥 보낸다고? 그렇다고 나중에 보복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청하가 죽는 데 녹쇠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녹쇠는 사실 내면은 착한 남자라는 건가. 녹쇠에 대한 서사가 없으니 그의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등장인물이 상당히 많고 흥미롭지만, 바리와 중심인물 몇 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여타 인물들의 이야기를 너무 생략한 감이 없지 않다. 바리가 주변부의 인물들, 소외된 인물들에게 죽음을 인도하는 자라면 상대에 대한 서사를 적어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게 설명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로 아쉬운 점은 서사가 많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이 많은 만큼 그들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서사가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애초에 이들의 이야기를 전부 풀어내기에는 책이 너무 얇다. 이 탓일까? 이들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못한 탓에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조금씩은 들어가 있지만 어느 이야기나 만족스럽지 않다. 결국 위에 말한 대로 서사는 얕아지게 된다.

종합하자면 소설의 매력은 충분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서사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아쉽다. 따라서 책의 분량을 늘려 부족한 서사를 채워 넣거나, 아예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한정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책 ‘프린세스 바리’는 바리데기 설화를 현대를 배경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옛이야기를 각색한 이야기는 많다. 특히 외국의 경우 북유럽 신화를 차용하여 게임, 소설 등을 많이 만들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는 자국의 신화를 가져다가 소설 등 미디어로 각색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자국 신화를 모티브로 작품을 만드는 것이 타국에 비해 드물었다. 따라서 이런 시도 자체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야기 자체로도 정말 재미있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은 바리데기 이야기를 꼭 한 번 찾아 읽어보기를 바란다. 이 소설의 바리와 설화의 바리는 닮은 점도 있고 차이도 있다. 이를 비교하면서 읽으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바리데기 이야기를 모른다고 해도 책의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강 그것의 줄거리를 알고 난 뒤에 독서를 시작한다면 더욱 즐거우리라.


프린세스 바리
제2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박정윤의 소설 『프린세스 바리』. 바리데기 신화를 바탕으로, 인천 변두리 지역을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세상의 규칙이나 가치에 대해 무지한 ‘바리’가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사랑을 살아가다가,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에 눈을 뜨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리와 주변 이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스런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열차 노선이 폐지된 이후 몰락해버린 수인곡물시장. 바리는 토끼 할머니와 지내며, 중국인 소녀 나나진에게 세상 물정을 배워가고, 굴뚝 청소부 청하와 사랑을 키워간다. 어느 날 시장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인 녹쇠가 바리에게 ‘하얀대문집’ 영감을 죽여달라고 의뢰하고, 바리는 그가 자신이 사람의 영혼을 인도했던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기만 한데….
저자
박정윤
출판
다산책방
출판일
201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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