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는 이야기가 무너진 시대에 산다. 사람은 더 이상 길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대할 능력이 없다. 더 짧고 강렬한 정보를 원한다. 심지어 더욱 짧은 정보를 위해 숏츠, 릴스 등과 같은 1분 내외의 짧은 동영상을 찾는다. 스마트폰의 등장과 발달은 이야기의 몰락과 정보의 몰두를 가속화했다. 이제 몸에 지니지 않으면 불안한 스마트폰의 존재감처럼, 짧은 동영상 정보의 존재감은 이제 무시할 수 없이 커졌다.
한편 이야기를 담은 책도, 말도 이제는 낯선 매체가 되었다. 애당초 위기였던 책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완벽히 몰락했다. 말은 아직 저항하고 있으나 미래 없는 싸움일 뿐이다. 사람들은 주변과의 대화보다 혼자 스마트폰 영상, 웹툰, 웹소설 따위를 보는 걸 편하게 여긴다. 둘은 이제 희망을 품는 것조차 사치인 지경이다.
이번에 필자가 고른 책 ‘서사의 위기’는 이런 현대 사회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이야기를 다시금 끌어올리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저자 ‘한병철’은 서사의 몰락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걱정하며 이 책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서사의 위기가, 짧은 정보를 열광하는 현대가 잘못된 것일까? 필자는 이런 의문을 갖고 책을 펼쳤다. 사실 정보의 등장과 확대, 전성기는 인류에 더할 나위 없는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를 정보화 사회라 부르지 않는가. 더 나아가 짧은 정보는 미래에도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Open AI를 필두로 다양한 AI가 실용화되는 시대를 사는 첫 세대인 우리는, 이런 AI가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하고 있음을 잘 안다. 이 빅데이터가 곧 정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도 없다.
반면 책은,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이야기는 필수재가 아니다. 없어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독서 안 한다고 나라 경제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내 지갑이 홀쭉해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니 심지어 독서가 돈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활동이라 험담하는 이도 있다. 독서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라는 말조차 나온다. 이런 시대에 이야기가 홀대받는 건 당연한 결과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단견이다. 서사의 가치는 단순이 먹고사는 데 있지 않다. 이야기는 정보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기능을 갖는다. 여러 가치 중 중요한 건 서사의 시간성이다. 다르게 말하면 시작과 끝을 가진 완결성이다. 정보는 시작과 끝이 없다. 어느 시점, 어느 순간에 기록된 파편의 모음일 뿐이다. 그래서 정보는 만들어진 순간, 가장 큰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새 정보가 그것을 대체한다. 결국 무수한 시간의 한 점에서만 존재의의를 갖는 것이 바로 정보다. 정보는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시간에 종속된다. 따라서 정보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인생의 궤적 전체가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챗바퀴처럼 변해버린다. 먼 미래는커녕 눈앞의 문제를 넘는데 급급한 인생 말이다. 이는 처음도 끝도 없는 정보가 낳는 비극이다.
이야기는 다르다. 처음과 끝을 가진 완결된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을 힘을 갖는다. 명문이 명저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심지어 지은 사람이 잊혀도 이야기 홀로 살아남기도 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간의 경험, 가치관 따위를 싣는 방주와 같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경험과 지식, 가치관을 전수받고 또 전수하며 문명을 이룩하고 발전시켰다. 이야기는 고로 인간 지성의 진화를 설명하는데 때려야 땔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더불어 한 개인의 인생도 이처럼 미래와 희망이 담긴다. 더 멀리, 더 크게, 더 높게 인생을 사는데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된다. 세상을 능동적이고 힘 있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서사의 위기에, 그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이미 이야기를 되살릴 수 없다고 자조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서사는 위축될지언정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본래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 힘이 있고, 그걸 듣고 즐길 줄 안다. 이것이 서사의 위기에 필자가 희망을 갖는 이유이다. 파편화된 정보의 바다 한가운데 표류하는 우리들은, 그렇더라도 스스로 방향을 찾을 충분한 힘이 있다. 우리가 사람이고,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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