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라
문득 우리의 ‘공부’는 잘못되었다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부를 하면 할수록 뭔가 채워진다는 느낌보다는 자꾸만 마음속을 퍼다 버리는 듯 공허함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공부가 부추기는 지독한 소외였다. 도서관 열람실이든, 스터디카페든 만석인 요즘에 오히려 사람들은 배경처럼 흐릿했다. 그나마 팬이 딸깍이는 소리, 기침소리, 숨소리, 가끔 들리는 코 고는 소리가 이들을 잠시 선명하게 했다. 물론 아주 잠시 뿐. 이내 배경으로 녹아들어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나는 그 속에 녹아들었다. 당연히 곧 나는 완벽히 고립됐다.
공부라는 단어는 그래서 당시의 외로움과 불안을 떠오르게 한다. 책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가, 정확히는 그 제목이 나를 끌어당긴 건 그래서였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부정적이었다. 공부가 안겼던 지독한 고립과 외로움으로 나는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펼친 건 그저 저자가 김승섭 작가였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에 앞장서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드러내는 그를 책깨나 읽은 사람이면 모를 수 있을까. 나도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유명 책의 저자라는 걸 곧바로 떠올렸을 정도였다. 한 번 속는 셈 치고 읽어보자고 마음먹었다.
책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저자의 가치관이 듬뿍 묻어난다. 그의 공부는 나의 그것과 달리 외롭지 않다. 오히려 온갖 차별받는 이들과 함께 할 때에야 느낄 따뜻하고도 끈끈한 유대감이 가득했다. 이는 저자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이기에 그랬다. 책은 그가 연대했던 이들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쌍용자동차 파업의 피해자들. 용산참사의 피해자들. 병 하나 걸려 죽을 죄인처럼 낙인찍혀 고통받는 에이즈 환자들. 그리고 합리적 이유 없이 혐오를 받아내는 성소수자들. 기타 약자들. 저자는 차갑고 잔인한 세상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자신의 학자로서의 정체성인 ‘공부’로 반응했다.
그는 다만 단순한 가여움에 이 책을 짓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자신의 삶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하기를 바란다. 책은 다수의 힘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학문을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지 드러낸다. 단단한 논리와 합리성은 언제나 돈도 시간도 많은 강자에게 굴종한다. 그런 학문들은 은근슬쩍 소수자를 배제한 채 진행하며, 그 결과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세련된 방식은 다수의 지지를 받는다. 소수자의 고통을 그 순간 가려진다. 그 베일 위에 교묘히 불쾌함을 덧씌우는 건 덤이다. 제 아픔을 정제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소수는 아무런 지지도 받지 못한다. 이들에게 학문은 너무 멀고 냉혹하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이가 필요한 건, 그래서 그들을 생각하는 공부가 확산되기를 바라는 건 저자의 시선에서는 당연히 맞이해야 할 미래의 모습을 투영한 것일 테다.
책에는 ‘근거의 부재가 부재의 근거는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현실의 불합리를 드러내는, 그래서 우리가 공감의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드러낸다고 본다. 다수가 속 편히 눈 돌린 결과가 바로 ‘근거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베일의 불편함 안쪽을 들추어보지 않고 내린 성급한 결론이 ‘부재의 근거’라는 망상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기득권에, 다수에 종속되지 않은 공부. 더 넓고 바른 시야로 공감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공부가 필요하다. 베일에 싸인 아픔을 끄집어내고, 다수에 충격과 깨달음을 일으키는 공부만이 현재를 바꿀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저자가 원하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가 가져올 결과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은 필연적으로 나의 불편함을 자극한다. 이에 눈을 돌리는 건 본능이다. 하지만 소수를 더럽고 악하고 추하게, 그래서 외면하게끔 하는 이 잘못된 사회를 고작 인간의 본능 때문이라 치부하며 쉬쉬하는 게 과연 맞는가. 이런 편견과 혐오의 사회는 우리가 저항 없이 그 본능에 쉽게 굴복한 탓이기도 하다. 우리는 결자해지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만든 현실이 바로 지금이기에. 만일 이 책을 읽는다면, 더는 불의에 순응하고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아픔에 응답하려면 결국 우리도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미래를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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