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내일을 끝내려면>

또 오늘이 시작됐다. 집 밖으로 나간다. 순식간에 외로움이 밀려든다. 주변에 사람은 많다. 하지만 정작 나를 보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들을 보고 있지 않다. 손에 든 스마트폰의 화면만 바라본다.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나는 혼자인 듯한 느낌이 든다.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인이라면 대체로 이렇다. 이 상황은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 모습이 되었다.
세상은 점점 각박해진다. 코로나19 때문은 아니다. 이 병은 고독을 표면화했을 뿐이다. 이전에도 수많은 연구는 외로움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렇지만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뾰족한 해법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느끼는 외로움 문제는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했다.
코로나19라는 세상의 위기 상황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고립이라는 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긍정적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전까지 학자들 외에 고립, 외로움 따위를 제대로 화두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의 외로움과 고립감은 상담가나 정신병원에서야 얘기할 수 있는 비밀이었다. 외로움으로 인한 아픔은 개인의 감정, 정신 문제라는 점 때문에, 그래서 다른 이들이 수군댈까 봐 쉬쉬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본 저서 ‘고립의 시대’는 현대 사회에 인간이 겪는 외로움에 대해 고찰하며,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 저자는 코로나19가 고립을 가속화하고 심화시킨 부정적인 요인은 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의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었던 공동체가 붕괴하고, 그들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병 때문이 아니다. 이 문제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단순히 병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원인 때문이다.
외로운 인간
외로움. 이는 현대인의 대표적 감정이다. 타인과 진솔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는가? 주변에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괜스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가? 밥을 먹을 때 상대의 대화가 거북한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고립감과 외로움에 놓여 있을 터이다.
분명 전 세계의 인구는 착실히 늘고 있다. 세계 인구가 100억을 돌파하는 것도 이제 꿈이 아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어째서 예전보다 더 외롭다고 느끼는 걸까? 원인은 바로 과열된 경쟁, 생산성만을 따지는 가치 추구,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타인에 대한 경계심 탓이다.
이를 살펴보기 쉬운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공동체에 걸맞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현실에서 학교는 사람의 관계를 중요하지 않다. 교사도 학부모도, 심지어 학생 자신도 숫자를 중요하게 여긴다. 성적, 내신 점수, 등수, 상점, 기타 수상 실적 등등. 이 숫자들은 학생의 경쟁을 통해 나오는 산물이다. 측정할 수 없는 친밀감, 배려, 사람 사이의 관계 따위는 다 부질없다. 숫자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쨌든 학생들은 이제 무한한 경쟁만이 전부라고 믿는다. 대화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라지고, 예민한 침묵만 남는다. 학부모와 교사는 이 문제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학생의 본분으로 포장하며 좋아한다. 결국 학생들의 침묵은 열정이 되고, 등수는 노력이 되며. 성적은 신분이 된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왜곡된 현실에서도 딱 들어맞는다. 학교 밖에 나오면 더 잔인한 숫자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말로는 스스로 고립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아니든 말이다.
경쟁과 탐욕으로, 더 좋은 숫자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회. 이런 곳에서는 누구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쌓기 어렵다. 그럴 마음이 있다면 다행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기는커녕 자기 내면 속으로 파묻히는 것을 택한다. 껍질 속에서 고립감과 외로움은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증식한다.
문제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어떻든 우리가 사람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앞의 명제도 바뀌지 않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이를 타계하기 위해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그건 바로 외로움 경제라고 불리는 슬픈 시장이다. 이 시장은 돈만 있다면 몇 시간 동안 친구를 구할 수 있다. 상대방의 스킨십도 사고 판다.(결단코 성매매가 아니다. 포옹과 같은 성행위 없는 감정의 위로 행위들이다.) 더 나아가면 공동체를 사고팔기도 한다. 공동체가 있는 주택, 공동체가 있는 일터, 기타 등등. 이 시장에서 외로움은 돈벌이의 수요이고, 위로와 공동체는 공급일 뿐이다.
참담한 건 이런 시장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는 것이리라. 사람은 이제 꾹 눌러왔던 외로움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일례로 한 고객은 위로를 받기 위해 자신의 가산을 대부분 처분했다. 주거는 차에서 해결하고, 자기 소유의 먹을 것은 회사의 냉장고에 쌓아둔다. 번 돈을 족족 이 시장에 쏟아부으니 그런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에게 외로움의 시장은 돈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그런데 만일 이런 시장이 없었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외로움을 견디고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왜 공동체는 붕괴하고,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사람의 역사는 공동체의 역사다. 공동체는 물리적인 환경이든 정신적인 면이든 사람의 생존에 꼭 필요했다. 특히 외로움은 공동체 안에서만 해소할 수 있는 감정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의 가치는 전에 없을 정도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항상 경쟁과 투쟁, 욕망과 배신을 경계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 원인은 개인에게만 돌릴 수 없다. 이러한 문화를 조장하는 데 국가와 기업이 일조했다.
생산성이 곧 돈이 되는 기업은 공동체의 파괴를 조장한 예상 가능한 주체이다. 하지만 국가가 주체라는 건 상당히 이상하다. 국가는 과거 인류 문명이 만들어 낸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는 이제 공동체의 가치를 저버리고 오히려 경쟁과 갈등을 부추긴다. 기업과 국가의 길고 지루한 세뇌 과정은 개인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개개인을 결속하던 공동체는 점점 파괴되고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국가가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다. 이런 경향은 영국의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 이전까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정당화되었다. 공공 서비스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진국 각국이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국가의 방만한 재정 운영과 경제 위기에 국가 기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국가는 기업의 마인드를 받아들였다. 생산성 있는, 작고 효율적이며 강한 정부를 추구하게 된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국가의 행태 변화는 곧 복지의 축소로 나타났다. 국가 서비스는 민영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다수가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경제 불황 속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살 길을 알아서 찾아야 했다. 여기서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희소한 일자리를 갖고 경쟁하며 서로를 경계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자 공동체는 버틸 수 없었다. 하나 둘 공동체들이 쓰러졌다.
그 결과 인간의 외로움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외로움을 해소할 공동체라는 공간이 사라졌기에 당연했다. 이는 자살률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혐오와 차별 문제가 점차 심각해졌다. 반대로 믿음, 신뢰, 사랑 등 화합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악해졌다.
이러한 예는 온갖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국에서 발생하는 인종차별과 그와 관련된 증오범죄. 일본에서 벌어지는 혐한 시위. 유럽 난민을 향한 차별과 극단적인 정당의 득세. 기타 세계 여러 나라의 분쟁들. 비단 외국에서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젠더 갈등이 있다.
한국의 젠더 갈등은 공동체 붕괴와 이로 인한 외로움의 결과다. 겉으로 보면 양 측 모두 혐오 발언을 쏟아내면서, 타자를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당사자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고 하면서 더러운 혐오 감정을 서로 노출한다. 하지만 이런 갈등 양상 속의 당사자들은 과연 자신들이 왜 상대방을 혐오하는지 알고 있을까? 아니, 혐오를 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고 있기나 할까?
어째서 이런 혐오가 발생할까? 저자의 책을 근거로 내린 필자의 판단은 인간이 가진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어째서 외로움과 혐오가 연결되는가. 근거는 바로 다음과 같다. 외로움은 공동체를 통해서 진정으로 해소된다. 따라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한다. 문제는 우리가 포용, 화합을 통한 공동체 형상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 형성은 굳이 화합을 통해서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공동의 적, 투쟁할 대상이 있으면 같은 적을 지닌 이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혐오, 남성의 여성에 대한 혐오의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혐오 감정을 통해 내부를 결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북한의 대남 도발과 같지 않은가? 북한은 종종 미사일을 날려 내부 단속을 한다. 혐오는 그들이 쏘는 미사일과 닮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필자는 이를 공동체 ‘비슷한’ 무언가로 지칭했다. 그건 이 집단이 절대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혐오로 묶인 집단은 상대가 없는 순간 무너지는 약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그 얄팍한 관계에서 느끼는 소속감에도 감지덕지한다. 그렇게 소속감과 안정을 느끼기 위해 혐오를 강화한다. 이 모순! 이 황당함! 결국 외로움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마음속에 쌓여갈 뿐이다. 오히려 혐오 감정이 외로움과 뒤섞여 사람을 비뚤어지게 만든다.
‘진정한’ 공동체를 위하여!
그렇다면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이는 개인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 차원에서 각각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개인 차원의 방법은 대화다. 그냥 대화가 아니라 아예 다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대화다. 저자의 책에서는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다고 한다.
물론 대화는 서로 평행선을 달릴 것이고, 더러는 싸움으로 끝날 것이며, 아예 감정의 골이 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원래 상대와의 대화는 그런 것이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모두 다 다르다. 특히 MZ세대는 공동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느낀 적도 없다. 애초에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대화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렇지만 공동체를 다시 세우기 위한 유일한 최선책은 대화다.
기업과 국가 차원에서는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유하는 공간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한다. 기업은 장소를 마련하고 각종 공동 활동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 한편 국가의 경우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공간이 되는 상점, 동네 서점 등의 지역 사업자에게 세금 감면과 같은 혜택을 주는 방법을 써보자. 어쨌든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은 국가, 기업이 직접 나서야 할 것이다.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일이다.
현대는 외로움의 시대다. 하지만 이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 다만 혼자서 해결하려는 생각은 버리자. 홀로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외로운 감정을 느낀다. 이 감정은 ‘우리’가 있어야 해소할 수 있는 감정이다. ‘나’에서 ‘우리’로 생각의 확장을 이루어야 한다.
이는 공동체를 배워본 적 없는, 경쟁과 갈등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포기하는 일은 없으면 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개인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고립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사회를 이루고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쑥스럽겠지만 먼저 말을 걸어보자.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눠보자.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자. 공동체를 이루는 그렇게 간단한 일로 첫 단계는 시작된다.
- 저자
- 노리나 허츠
- 출판
- 웅진지식하우스
- 출판일
- 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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