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과연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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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갈등으로 몰아가는 이슈가 있다.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다.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 표면화된 건 정치 분야였다. 특히 선거로 이들의 존재를 안 사람이 많다. 중장년, 노년층의 경우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는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오래된 문제이며 계속되고 있다.
이 책 ‘소모되는 남자’는 지금도 한창 치열하게 논쟁 중인 서구에서 나왔다. 이 책은 남성이 과연 좋은 것인지 의문에서 시작한다. 이는 페미니즘에서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주장에 대한 되물음이다. 이 주장이 옳다면 남성은 분명 이점이다. 과연 그러한가? 작가는 남성이 ‘이점’이라는 주장에 반대한다. 즉, 이 책은 페미니스트가 주장인 ‘억압’에 대해 반박하는 책이다. 작가는 남성이 문화의 소모품으로 묘사한다.
남성은 문화의 소모품이다
올해 수십 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아직 3월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렇다. 이들은 붕괴된 건물에 깔려 죽었다. 모래 더미에 파묻혀 죽었다. 용광로에 떨어져 녹아 죽었다. 기타 등등의 사고로 죽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절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이다.
들어가기 전에 우선 말해두고 싶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남성이 이만큼 고통받으니 여성은 입을 다물라는 뜻도 아니다. 그냥 사실을 말할 뿐이다. 노동 시장에서 사고로 죽는 사람은 남성이 대부분이다. 여성과의 비율은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다.
우리는 성 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 한편 목숨은 인간이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렇다면 목숨이라는 중요한 가치도 성적으로 평등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노동 현장에서 사망한 자의 남녀 비율은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이 대다수다. 남성 목숨의 가치는 여성의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음 예로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 이야기를 해 보자. 앞서 우리는 성 평등이 당연하다고 여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군인의 남녀 성비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한쪽 성별이 전쟁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바로 남성이다.
우크라이나 리비우는 타 유럽 국가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도시의 기차역은 인산인해다. 하지만 이들 중 기차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여성과 노인 그리고 어린아이뿐이다. 성인 남성은 기차 탑승을 거부당한다. 성 평등과 목숨의 가치를 생각하면 이는 이상한 일이다. 당연하다는 듯 남성만을 징집 대상으로 올리는 법안, 당연하다는 듯 기차에 오르는 여성과 아이들. 이걸 보면 과연 남성의 가치가, 특히 성인 남성의 목숨 값이 과연 여성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평등한가?
다음 예를 보자. 세상의 모든 문화권은 여성과 어린아이의 죽음에 더 크게 슬퍼하고 아파한다. 일례로 신문은 여성과 어린아이의 죽음에 대한 표현은 정말 끔찍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하지만 남성의 죽음은 다르다. 앞서 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여성과 어린아이의 죽음을 보도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그게 몇 명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이들이 죽었을 때, 훨씬 더 많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성 군인들이 죽었다. 그 수는 비교할 가치도 없다. 러시아 군인만 해도 이미 10,000여 명이 넘게 죽었다. 그런데 여성과 어린아이는 그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사람만이 죽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성과 어린아이의 죽음에 더 큰 아픔을 느낀다. 과연 이 감정이 옳은가? 평등한가?
어째서 이런 상황이 발생할까? 왜 어떤 성별의 죽음은 다른 성별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걸까. 그건 문화 때문이다. 문화는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생존하는 실체이다. 문화는 매 순간 성장과 도태의 갈림길에 놓인다. 여기서 문화는 가장 효율적인 생존, 발전 방법을 사용한다. 바로 그게 무엇이냐. 남성을 소모품처럼 끝까지 쥐어짜 쓰고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다. 여성은 이러한 대우를 받지 않는다. 아이를 낳는 행위 주체가 바로 여성이기 때문이다.(여성의 가치가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문화라는 시스템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이 바로 다산이라는 뜻이다.) 문화의 입장에서 인구수는 큰 장점이다. 문화는 여성이 최대한 생존하여 아이를 낳기를 바란다. 반면 남성은 사실 인류의 재생산 측면에서 여성 대비 반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더 적어도 된다.) 반면 여성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실제로 인간의 유전자를 조사하면 남성 조상과 여성 조상이 현재 인간의 유전자에 기여한 정도는 1:2이다.
남성이 소모되는 이유를 보면 불만을 가질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가령 여성의 가치가 아이를 낳는 것이라는 말은 요즘과 같은 성평등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차별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가치는 ‘문화’가 인간 남녀에게 부여하는 가치를 말한다. 당연히 문화는 인간성이 없다. 가치 판단을 하지도 않는다. 문화가 원하는 것은 더 오래, 더 강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화는 인류의 재생산에 상대적으로 기여가 적은 남성들을 위험하고 소모적인 일로 은근히 내몬다.
문화란 무엇인가?
앞서 문화의 이유로 인해 남성이 소모품으로 취급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는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한 걸까? 인간관계를 맺는 남녀의 차이부터 문화의 탄생과 발전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보도록 한다.
우선 인간관계에서 남성과 여성은 관계 형성에 차이를 보인다. 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닌 선호도의 차이다. 여성의 경우 친밀한 소그룹 혹은 1:1 관계를 선호한다. 반면 남성은 대규모의 구조적 조직을 형성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때 남성은 여성이 만든 관계에 비해 구성원 간의 친밀도는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문화는 남성이 만든 대규모의 구조적 조직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그런데 문화는 남성이 만들었지만 이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문화는 만들어진 순간부터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문화는 자신을 강화하는데 몰두한다. 생존을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문화가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바로 소모이다. 대상은 바로 이 거대 구조를 만든 남성이다. 문화는 의도적으로 경쟁과 갈등을 유발한다. 이는 남성 자신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아세운다. 경쟁에서 이기는 남성은 많은 혜택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밑바닥으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하루하루 남성은 피 말리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모된다.
현대, 여성도 이제 소모품이다
최근 여성들도 대규모 조직 문화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성을 소모품으로 성장한 문화가 이제는 여성을 소모품으로 취급한다. 하루하루 피 말리는 경쟁과 갈등, 그리고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여성은 진이 빠진다. 더구나 동료 남성들의 냉대와 무관심은 마치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여성이 볼 때 동료 남성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보다 더 쉽게 경쟁을 이기는 듯하다. 마치 그들 만의 리그가 있고, 여성은 혼자 바깥에 나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저자의 말로 이는 오해다. 차별이 없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차별이라고 오해할 여지가 있는 순간도 있다. 남성 집단에서 경쟁과 갈등은 당연하다. 서로의 친밀도는 낮다. 애초에 능력이 없으면 어제의 동료가 내일의 밑바닥으로, 능력이 있으면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윗선으로 바뀐다. 이걸 문화는 여성들에게 똑같이 요구한다. 남성들은 자신이 소모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남성들은 오랫동안 문화의 소모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여성들에게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대우는 친밀함을 전제로 하는 여성의 인간관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관계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소모품인 상황을 자신을 차별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당연히 오해할 수 있다. 소모품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도 많고, 이를 못 견뎌하는 남성도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개 남성은 소모된다는 그 사실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문화의 영향으로 소모를 당연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러한 대우는 여성에게 견디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트레이드오프
이 책의 저자는 ‘트레이드오프’ 개념을 이 주제에 적용한다. 저자는 남성과 여성이 분명히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차이가 있었기에 인간은 지금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요컨대 두 성별의 차이가 합쳐져 시너지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는 흔히 남녀의 차이는 없거나 매우 적다는 주장과, 이를 근거로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성취를 이루는 것은 남성의 억압 때문이라는 주류의 시각에 반한다.
필자가 보기에 저자의 생각은 일리가 있다. 물론 남녀의 능력이나 성취도 면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활 곳곳에서 성별에 따른 차이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곧장 떠올릴 수 있는 차이로 근력이 있다. 또 관계 맺기의 차이, 관심사의 차이 등 다소 불분명하지만 두 성별이 같다고 말할 수 없는 점들도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선호도의 차이가 두드러지는 진로에 대해 살펴보면 남녀의 선택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학, 특히 공과 대학의 경우 어느 과를 막론하고 여성보다 남성이 더 많다. 이에 대한 기존의 시각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 가부장제에 의해 공과 대학 진학률이 낮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유인책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공과 대학 진학률은 그리 늘지 않았다. 당연하다. 평균적으로 여성의 공과 대학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억압 때문도 아니고, 능력이나 성취도 문제도 아니다. 여성도 시킨다면 남성과 똑같은 실력을 낼 수 있다. 성취도 할 수 있다. 다만 선택의 기로에서 이를 택하지 않는 것뿐이다.
반면 인문 대학, 인문 계열의 경우 여성의 수가 많다. 반면 남성의 수는 그보다 못하다. 이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능력이나 성취도 문제가 아니다. 선호의 문제다.
결국 결론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덧붙여 이 차이는 하나로 합칠 경우 각 성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차이를 가지고 차별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융합하여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좋겠다.
책의 아쉬운 점
이 책은 필자가 보았을 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남녀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나눠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트레이드오프 개념이 급진적이라고 한다. 맞다. 남녀 차이는 없고 따라서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비교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의 시각, 특히 남성 혹은 여성에 대한 특질 등의 설명은 구시대의 사고관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저자가 생각하는 남성의 경우 성욕의 화신이요 경쟁의 포로다. 여성은 온화함과 부드러움의 대표이고 친밀함의 상징이다. 물론 일부 예외를 인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건 성별로 딱 잘라서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인간은 개개인이 전혀 다른 특질을 지닌 하나의 인격체다. 따라서 성별이 인간의 속성을 온전히 혹은 대체로 결정짓는다는 이런 사고방식은 납득하기 어렵다.
둘째,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과 남성을 선호하는 문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의 글은 논리 정연하다.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런데 저자는 여성에 대한 억압이 실재보다 과장되었다는 언급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과연 그러한가. 필자는 여성에게 벌어지는 모든 문제가 가부장제, 억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남성이 자신을 위해 여성을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차별하는 것이 모든 여성 문제의 근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차별은 분명히 존재한다. 예컨대 취업에 있어서 여성이 받는 불이익은 절대 상상이거나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그 내용을 않는다. 필자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 화제를 꺼내는 것을 일부로 회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셋째, 성별을 남녀 두 종류로 한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저자는 남녀 성별에 대해 설명할 때 선호도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각 성별이 가진 내면의 특성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왜 남녀 두 성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분명히 우리는 성소수자가 존재함을 안다. 이들의 경우 성소수자가 아닌 남성, 여성과는 다른 성 정체성을 갖는다. 성 정체성의 종류도 다양하다. 머릿수도 상당하다. 그런데 저자는 이들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명 외형적인 부분이 아닌,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 이것이 외부 성기의 모양으로 결정되는 사항인가? 선호도에 대해, 특성에 대해 말할 샘이었다면 성소수자의 관점 또한 책에 포함되는 것이 맞다. 이 책의 저자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궁금하다.
최근 많은 페미니즘 저서들이 나오고 있다. 현재 이 주제는 민감하고 또 뜨거운 주제다. 그렇기에 이 책 ‘소모되는 남자’는 특별하다. 페미니즘 책이 난무하는 가운데, 남성 학자가 쓴 남성에 대한 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에 대해서 쓴 페미니즘 도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가 남성인 서적은 정말 드물다. 이는 아직 대한민국이 젠더학 붐이 일어난 초창기이기 때문이리라. 젠더학을 흔히 페미니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하지만 서구 사회, 더 가까이 보면 일본의 경우 남성학이 몇십 년 전부터 있어왔다.
이 책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젠더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책이 나올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젠더학이 더욱 발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특히 남성학의 발전이 꼭 필요하다. 여성학만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이 학문은 발전이 정체되고 외국의 이론을 수입하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경쟁하는 상대 학문의 존재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이다. 이를 통해 성별 간 갈등을 조장하는 학문이 아닌, 화합에 앞장서는 젠더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젠더 갈등은 앞서 말했듯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서구 사회가 그러하듯, 첨예한 갈등과 사건 사고, 논란들이 끊임없으리라. 하지만 저자의 생각처럼 남성과 여성은 서로 혐오하고 차별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합쳐서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고, 더 굉장한 일을 할 수 있다. 이 성장통의 끝에 행복한 결말이 있을 것임을 믿는다.
- 저자
- 로이 F 바우마이스터
- 출판
- 시그마북스
- 출판일
- 2015.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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