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본 그 달은 그 없이도 항상 떠오른다
나는 왜 이 책을 펼쳤는가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이미 고인이 된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성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러니까 유고집 비슷한 책이다. 사실 류이치 사카모토는커녕 음악 자체에 관심이 없는 나는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되고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인의 마지막 저술이라는 뜻깊은 책이라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생판 남의 사정에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왜 결국 펼쳤는가? 그의 유명세에 끌린 것도 아니요, 유행을 타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나는 그의 사회 운동가적 면모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반원전 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내 관심을 끌었다. 그는 3.11. 동일본 대지진과 그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건 이후 원전 반대 운동에서 연단에 서서 연설한 경험이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이 될 때면 원전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내게는 세계적인 음악가라면 으레 떠올릴 법한 이미지가 있다. 좋게 말해 품위 있고, 나쁘게 말하면 잰체하며 세상만사에 초연하고 제 음악적 성과를 높이는데 열중하는 사람. 그런 고정관념을 깬 것이 바로 류이치 사카모토였다. 하루는 잘 차려입고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치고, 또 하루는 시위대 사이에 끼어 탈원전 구호를 외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시위대 가운데에서 그는 어떠했을까? 어색하게 서 있었을까. 아니면 목 터져라 반대 구호를 외쳤을까. 혹은 깃발이나 슬로건, 촛불 같은 시위 용품을 흔들었을까.
처음은 이렇게 반원전 시위대 일원으로 활동하는 음악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더랬다. 그 뒤에는 그의 글귀를 통해 어째서 그가 이런 일들에 가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그의 음악 작품에, 설치 미술 작품에 잘 드러나는 자연을 대하는 자세 때문이다. 그는 대성한 음악가임에도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노력하는 마음가짐을 항시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인간이 만든 음악으로 인위적, 계획적, 그리고 분절적인 특성을 가진 소리, 예컨대 학창 시절에나 쓸모 있던 입시 음악과도 같은 소리를 배제했다. 오로지 자연이 직접 만드는 소리를 수집하고 활용하고 또 재현하는데 온 신경을 다 썼다. 이는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오로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자연 그 자체의 가치를 작품으로 녹여내는 그가 반대편 극단에 있는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이 아니더라도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인해 이 발전 방식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했으니 이를 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수많은 인명을 잃었으면서도 원전의 위험을 애써 무시하는 일본 정부의 작태에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동일본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대한 저자의 소신이 담겨있다. 사고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관련 활동을 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특히 그는 암에 걸렸어도 관련 콘서트나 설치 미술을 하고 행사 디렉터를 맡아 일을 진행한 것은 그의 신념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적고 보니 류이치 사카모토의 음악가적 면모보다 환경, 자연을 사랑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운동가의 모습만을 강조한 듯하여 괜히 고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이 글을 읽고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추가하자면 책에는 그의 음악가적, 예술가적 면모도 자세히 드러난다. 특히 그와 친분 있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한국인 예술가인 이우환 작가와의 관계를 책 내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어 괜히 친근한 느낌이 든다. 또 한국에서 있었던 일화도 간간히 실려 있어 낯선 일본인 음악가의 이야기에 더욱 흥미를 가질 수 있었다. 만일 저자를 잘 알고 또 음악에 조예가 있는 독자라면 책 속의 저자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잘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자연 속에서 흘러가는 소리를 채취하고 느끼고 경탄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 느낌을 곡에, 작품에 담으려 노력하는 그의 옆얼굴을 상상해 본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은 이 책에 빼곡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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